아빠의 여자
이번 제주여행을 위해 하루 전 서울집에 올라가 시간을 보내는 중에 딸아이가 그랬다.
- 아빤 다른 여자도 못 사귀어본 것 같애~
= 응? 왜? 아빤 많이 사귀어 봤어. 엄마가 못 사겨 봤을걸???
부녀간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아내가
- 왜 이래~ 나 좋다는 놈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하고 참견을 한다.
나나 혹은 아내가 다른 이성을 사귀어 봤느냐 아니냐의 진위가 중요한 건 아니고,
아이에게 '왜 그리 보였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이번 여행 중에서도 드라이브 중에 담배 냄새에 질색해 하는 아내에게 반강제로 뽀뽀를 하면 아이는
'남들이 하면 그냥 19금인데 엄마아빤 혐오물이야~'하고 핀잔을 준다.
나는 안다, 녀석이 정말 혐오스럽게 느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아이의 눈에 비친 아빠의 모습은 여자도 못 사귀어보고 마냥 엄마만 좋아하는 걸로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결혼 후 언제 쯤인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겠다만 어느 날 문득 그런 걸 깨달았다.
삶에 치여 그저 서로가 충돌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밋밋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중에...
그런 상황에서 마음은 밖으로 겉돌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내 마누라도 밖에서 다른 남자가 본다면 매력적인 여자일텐데 정작 나는 그걸 외면하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에 미치자 연애할 때 좋아했던 감정을 찾아보듯 새삼스레 아내의 모습을 슬쩍슬쩍 지켜보자니
피곤한 중에도 내 밥을 차려주는 모습조차 고맙게 보이기 시작했다.
보통의 경우처럼 나 역시도 내 가족, 아내와 딸아이를 사랑한다.
다만... 한 손에 딸려있는 손가락들이 모양과 역할이 다르듯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 딸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모양과 방식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난 딸아이보단 아내를 더 사랑한다.
궤변인지도 모르겠다만 그게 내 피가 남겨진 딸아이를 더크게 사랑하는 내 방식이라 생각한다.
어찌보면 이기적인 계산이 깔려있는지도 모르겠다.
가족을 두고 혼자 귀농한 상황에서 혼자 일을 하다보면 온갖 상념에 젖어들게 되는데
- 이렇게 혼자 일하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 의식이 있어 누군가에게라도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맨처음 어디에 전화를 해야할까?
그런 생각에 미치자 내가 자리에 눕게 되면 결국 최후까지 내 옆을 지켜줄 사람은 아내란 답을 얻게 되었다.
오랜 친구라도 그건 아닐테고, 딸아이는 그애가 원한다해도
내 사랑하는 그애의 삶을 위해서라도 내가 밀쳐내야할 판이다.
애초 의도에 비해 얘기가 옆으로 새는 듯 싶은데, 딸아이에 대한 마음은 다음에 기회가 닿을 때 따로 적기로 하고...
하여간 부부란 게 서로가 만들어 가기에 따라 천차만별의 모양이 되는 참 오묘한 인간관계다.
결혼 전 연애 시절에 아내와 약속하길,
머슴이나 하녀가 필요해 결혼하는 건 아니니까 주도권 싸움 같은 건 하지 말자고 했다.
또 한달에 한번은 저녁에 TV 대신 촛불을 켜기로 했다.
돌아보면 힘든 시기를 참 잘 견뎌주었고 지금도 늘 애쓰는 아내가 고맙기만 하다.
그런 아내에 대한 약간의 애정표현이 아이에겐 아빠의 모습이 다른 여자를 못 사귀어본 채
마냥 엄마만 좋아하는것 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서른을 훌쩍 넘겨 결혼한 남자에게 사귀어본 여자가 없다고 하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게다.
아내는 내가 죽는 날까지 끝을 두지 않고 가장 오래 사귀는 여자인지도 모르겠다.
내일, 토요일에 일찍 내려와 내가 들어갈 본가의 방에 도배를 같이 하기로 했는데
저녁에 일을 마친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마눌이 병이 났다며, 몸살 같은데 오한이 넘 심하단다... ㅠㅠ
제주여행을 위해 쉬는 날의 일을 몰아서 했던 것에 무리가 된 듯 하다.
그저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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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행 포스팅에도 포함된 사진이지만 다시 한번 따로 남긴다.
찍사인 딸애가 DSLR을 잘 다루지 못해 인물은 어둡게 나왔지만
난 아내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모습을 남들은 바퀴벌레 한쌍이라고들 한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