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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과 취농의 사이

[취농] 선택의 과정...2/2

동생의 공장을 그만두고는 그냥 집에서 노는 모습 보일수가 없었습니다.

놀아도 밖에 나가서 놀아야는데 그런 상황에선 놀 마음도 생기지 않고...

마음도 식힐 겸,늙으신 부모님의 일이라도 거들고자 여름 동안 시골에 가있기로 했습니다.

참더웠던 2004년의 그 여름, 나름대로는거든다고 했지만 부족한 점이 많았지요.

그렇게 한 여름철을 지내며'비닐 하우스'의 내용을 듣게 되었습니다.

적지 않은 투자비용과 그에 따른 소득수준은 제가 전혀 알지 못하던 세계였습니다.

전 그때까지만 해도 농촌이 가난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도 '늙어서 먹고살만한 돈 가지고 내려올 대상'이라 얘기하곤 했었지요.

그러나...알고보니 농촌이 가난한 게 아니고 제 본가의 동네가 가난한 것이었습니다.

지형적으로 높은 산이 남쪽을 막고 있고

경지정리도 되지 않은 논이라 하우스가 들어서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넓지도 않은 논밭에 벼 심고,채소거리 심어서는

결코 고소득을 올릴 수 없으니까요.

서울은 이미 명퇴자들이 일거리를 찾아 헤메는 상황에서

내 주머니엔 투자할만한 돈도 없는 처지에

서울에서 무언가 하기엔 너무도 막막했었기에

머리를 식힐 겸 내려온 것이었는데

비로소 의외의 새로운 길을 찾은 기분이었지요.

그래도 서울에서 비비면

그 업계에서 전산 시스템의 정착이 필요한 업체라든지 등등

무언가 일자리야 못 찾겠습니까만...

그건 회사를 그만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었구요.

제 생각에서울이란 곳은

이미 '파이'는 조각만 남은 상태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나누어 먹어야 하는 환경이 되어 버렸다 생각했었습니다.

시골에 지내면서도 한 달에 한두번 서울집엘 다녀오며

대충은 아내에게 얘길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아내도 내심 마음의 준비를 했더군요.

'이 사람, 하우스를 할 모양이구나...'

가을이 완연해서 일 거든다고 내려와 있던 시점을 마감하고

서울에 올라가서 아내와 상의를 했습니다.

말이 상의지, 이미 심중을 알던 아내는 두말 없이 동의하더군요.

그리곤 1주일인가 2주일인가 지나 어머니의 생신 때

식구들 같이내려와서 정식으로 부모님께도 알렸습니다.

딸아이 임신 중 사표를 낼 때도 그랬고

월급쟁이 그만한다고 사표낼 때나

또는 하우스를 한다 했을 때 등등

나를 믿고 두말 없이결정을 따라준 아내에게

이 글을 통해 다시금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특히 하우스 한다했을 때 떨어져 살아야하는 여건에서

아내의 동의가 없다면 무턱대고 내려오진 못했을테니까요.

하여간... 그런 결정 후,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각각 1000만원씩, 2000만원이란 돈을 선듯빌려주더군요.

그 정도 신의는 얻고 살았구나 하는 뿌듯한 감회 속에서도

한편으론 웬지 남모를 서글픔 같은 것도 교차하고...

맨 처음... 막상 하우스를 알아보러 다니자니... 문득두려웠습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핑계대고 며칠 여행이라도 가서 다시 생각해 볼까...?'

본가는 농촌이지만 애기 때부터 시내에서 크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다녔으니

사실상 도시인에 가깝다고 봐야지요.

그런 내가 막상 농촌으로 내려가 하우스를 하겠다는 생각이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참 큰 두려움이 마음을 흔들더군요...

그러나 가장으로서 처자식 먹여살려야 한다는 명제 앞에선

도망갈 곳마저찾질 못하겠더군요...